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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기자리뷰] 그 사랑이 안타까운 만큼 아쉬움도 남았던 <The Last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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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1월 11일(일) PM 3 :00
양준모, 배해선


상연 전부터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 작품,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를 보고 왔습니다. 이 작품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 상연 전에는 마치 매일이라도 볼 수 있을 것처럼 의욕에 차 있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마지막 티켓 오픈에 즈음하여 겨우 첫 스타트를 끊었네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 되었어요. 공연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딱 알맞게 간이 밴 음식을 먹는 느낌이랄까요.

충무아트홀은 쓰릴 미.. (언제적 쓰릴 미;;) 이후로 찾는데 참 오랜만입니다. 티켓을 찾고 로비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자니 검은 코트의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네요. 아니 성기윤씨 아니십니까!!!! +_+ 와우- 설마하니 원조 제이미를 만나뵙게 될 줄이야.. 공연 보기도 전부터 느낌이 좋은데요?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왼편에 있는 시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1부터 5까지만 숫자가 적혀있는 걸 보니 제이미와 캐시의 5년간을 나타내는 소품인 모양입니다만, 어째서 왼편에 걸려있는 걸까요. 중앙에 있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공연 중간 몇번인가 시계 쪽으로 시선을 주긴 했지만 오히려 시선 분산만 되고 작품 이해에 전혀 도움은 안되더군요. 시계 바늘은 2개인데 어째서 2개인거지? 나중에야 알았지만 제이미와 캐시의 서로 다른 시간을 가르키는 거라더군요. 얘기 듣기 전까진 전혀 몰랐고;; 아니, 얘기 듣고도 모르겠던걸요. 저 2개의 바늘 중에 어느 것이 제이미이고 어느 것이 캐시의 시간을 가리키는지.. 이왕 할거면 제이미와 캐시의 시계 바늘 색을 다르게 하던지 좀 더 명확한 구분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OST로 듣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드디어 극이 시작하나 보다 마음을 가다듬고 있자니 나지막이 나레이션이 깔립니다. 지금 여러분은 사랑을 시작하는 남자와 사랑이 끝나는 여자의 5년 간의 이야기를 볼 거다-는 식의 극에 대한 부연 설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 작품의 독특한 구성에 대해 사전적으로 관객의 이해를 구하는 연출이었을지 모르나, 이건 과잉친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 순간, 똑같은 음으로 캐시의 Still Hurting 이 시작하니까 이 부연 설명과 극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느낌이 든다기 보다는 극이 한번 마무리 지어졌다가 새로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스타트 지점이 두 군데일 필요는 없잖아요. 이 작품의 독특한 구성에 대해선 극장 로비의 게시물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웬만한 관객들은 알고 왔으리라 생각하구요. 아니면 극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것도 좋겠지요. 공연 전의 어수선한 느낌과 더해져 의미를 알 수 없는 나레이션은 쓸데없는 접붙이기 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 때 그거 집중해서 듣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처음에는 굉장히 답답해보일 정도로 무대가 좁아보였는데 극이 진행되면서 무대 장치들이 양 사이드로 벌어지니 무대 자체가 그렇게 좁은 건 아니더군요. 골판지 소재(?)로 만들어서 베스트 셀러 작가가 사시는 집 치고 없어보이긴 했지만, 그 의미를 곱씹어보건데 제이미와 캐시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습니다. 가사에도 나오지만 바람 불면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카드로 만든 허술한 집을 이미지화 한 것 같아요. 겉보기엔 멀쩡해보이지만 속은 부실하다는 의미에서.. 물론 이 골판지는 겉보기에도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지만요;; 극 초반부엔 무대 장치와 소품 때문에 배우들이 너무 분주해보이더라구요. 한명이 노래하고 있는데 다른 한명은 벽을 옮기고 있으니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배우가 단 2명만 출연하는 작품으로서의 심플한 느낌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정신없고 산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극 후반부로 갈수록 무대도 넓게 쓰고 분위기도 안정되어 갔지만요. 혹시 초반부의 정신없음은 너무 빨리 뜨는 제이미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된 연출? 이라기엔 당시 슬픔에 빠져있던 캐시는 어쩌고;;

이번 한국 무대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디테일한 설정에 있어 원작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점 입니다.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는 주로 노래로만 이루어진 극이다보니 원작과의 비교를 위해 굳이 일반관객이 넘볼 수 없는 대본의 영역까지 욕심 낼 필요도 없거든요. 멀리갈 것도 없이 원작자인 JRB 홈페이지만 가도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전곡 가사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넘버 중간중간의 세세한 설정까지도 공개되어 있는데요. 이것을 참고하면 이번 한국 버전이 얼마나 신경써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원작 따위 깡그리 무시한 일본판을 먼저 접했던고로 캐시가 오하이오에서 제이미에게 편지를 쓸 때는 어찌나 감격했던지.. 빗자루 대신 책더미에 걸터앉아 있을 때는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구요. (혹자는 이거 캐시가 제이미 책까지 팔러 다니는 거냐고 오해하던데 아닙니다. 제이미 책은 굳이 캐시가 팔러 다니지 않아도 잘 팔려요;;) 아무리 그래도 센트럴 파크의 보트까지는 등장시키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원작의 설정을 최대한 따르려는 노력이 엿보여서 좋았어요.

문제는 가사 번역인데.. 비단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뿐만이 아니라 해외 작품을 국내에 들여오면 번역 문제는 어딜 가나 따라붙는 숙제죠.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역시 예외일 수 없지만 번역, 아니 의역의 수준을 넘어서 내가 지금 다른 작품을 보고 있나-는 착각이 들 정도의 개사는 공연 내내 마음에 걸리더군요. 특히나 문제 삼고 싶은 건, 바로 The Schmuel Song 의 가사 입니다.

슈무엘송은 제이미가 자신의 신작 소설을 캐시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작품 안의 또 다른 작품 이라는 액자식 구성 씬입니다. 크리모비치의 양복점을 운영하는 슈무엘이라는 할아버지가 어느 날 말하는 시계로부터 영원한 시간을 약속 받고 세상에 하나 뿐인 환상의 드레스를 만든다는 판타지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죠. 이 소설이 교묘하게도 현실의 캐시와 맞물리면서 제이미가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거에요. 슈무엘은 41년 전에 오데사에 사는 한 아가씨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 드레스를 만들었지만, 크리모비치 밖의 세상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녀와 함께 떠날 수 없었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 모습이 지금의 캐시와 닮았다는 겁니다. 제이미는 그런 그녀에게 슈무엘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거구요. 그런데 이번 한국 버전에선 엉뚱하게도 지나가던 여인이 슈무엘이 만든 옷에 반해 다음 날 바로 결혼 했다고 하질 않나... 더 가관인 건 그 다음 가사, "제자리 걸음 하는 사람들 핑계들은 많겠지" 라니요!!!
오, 맙소사. 방금 핑계라고 했나요? 저는 제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캐시를 핑계나 대는 여자로 전락시키다니.. 지금 캐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지는 못할 망정 '나는 네가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러고 사니.' 라는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겁니까. 이러니까 니가 ㅆㅂㄴㅁ 소리나 듣는거야, 제이미!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습니다. 제이미가 슈무엘 송을 부르는 시점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이고 이 때 두 사람은 한창 사랑하고 있을 때 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자기 밖에 모르는 말을 할 수가 있나요. 소위 말해 짜게 식었습니다. 적절치 않은 번역으로 인해 한 캐릭터의 성격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도 있구나 라는 걸 이번 공연을 보면서 실감했어요. 이 극은 원작자인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성별 '남')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남자인 제이미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극 후반부에 제이미가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것까지 용서(...는 안되지만 납득은)될 정도로 쓰여져 있죠. 캐시가 나를 이렇게 막 대하는데 내가 홧김에 바람 안 피우고 배기겠냐는!!! 라는 내용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미 ㅆㅂㄴㅁ 소리가 나오도록 한 건 번역의 잘못이 크네요.

물론 아주 잘 된 개사도 있어요. 'A Miracle Would Happen' 에서 세상 여자들 모두 감자로 변해라! 같은..  이건 정말이지 센스 최고乃 라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극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분명 더 좋은 표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볍고 유치한 단어로 점철된 게 아쉽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역을 넘어선 극의 의미를 벗어나는 창작 수준의 번역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또,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는 그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숨겨진 복선들이 많은데요. Reprise가 먼저 나오고 그것이 복선이 되어 나중에야 비로소 본래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가사들, 예를 들면, 캐시의 넘버 중에 "You and you and nothing but you" 는 'See I'm Smiling' 에서는 제이미를 비난하는 가사로 등장하지만, 'I Can Do Better Than That' 에서는 똑같은 가사, 똑같은 음율이지만 제이미에 대한 사랑의 노랫말로 그 의미가 달라지죠. 이러한 복선들을 전혀 살리질 못해서 아쉽더라구요.

제이미역의 양준모씨는 마치 동전을 뒤집 듯 확확 바뀌는 연기를 보여주시더군요. 어느 시점이 되자, 캐시에 대한 사랑이 전무(全無)해지시더라구요.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확연히 바뀌어서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캐시를 구할 수 없었고 그래서 떠난 게 아니라, 결혼한 순간부터 이미 작정하고 버리려고 하시더군요;; 특히 'If I Didn't Believe In You' 를 윽박지르고 화를 내면서 심지어 침까지 튀겨가면서(;) 부르시던데... 저는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 캐시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설득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양준모씨는 그야말로 버럭! 제이미. 였습니다. 그 협박을 듣고도 드레스 안 입은 캐시도 강적이다! 라고 생각되었지만요;; 그리고 마지막 'I Could Never Rescue You' 를 부를 때엔, 이미 제이미에겐 캐시에 대한 증오와 미움 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요. 애증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칼로 도려내 듯 깨끗하게 감정 정리가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너 때문에 다 틀어진거야!' 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 모두 상처받았지' 라는 결론을 보고 싶었던 저로서는 조금 아쉬운 제이미였습니다만, 뭐, 배우마다 캐릭터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 부분은 이건명씨 공연을 보고나면 또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네요.

배해선씨는 너무 잘해주셔서 더 이상 제가 덧붙일 말도 없습니다. 캐시 그 자체였고,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이런 그녀를 어떻게 버릴 수 있는건지 이해가 안가고 작품을 보면서 몇 번이나 울컥거렸는데 그만큼 호소력이 굉장했어요. 내가 찾던 캐시가 여기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네요. 제이미도 말이야, 명색이 베스트 셀러 작가면 자기 소설 영화화 해서 캐시를 주인공으로 꽂아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서로 윈윈하는 전략은 없었을까요. 시작은 분명 같았을진데 끝이 달라도 너무 달라진 안타까운 커플이에요.

아쉬운 점을 많이 늘어놓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만족스럽게 봤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이 극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웠어요. 공연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났는데도 자꾸 생각이 나고, 또 보고 싶고.. 다음에는 좀 더 극의 내용에 집중해서 보고 싶네요. 아, 밴드가 안 보여서 MR 이라고 생각했는데 라이브 연주더라구요. 이 작품의 또 다른 숨은 주역들에게 박수를! 음악 좋은 건 새삼 말하기도 입 아프죠^^